데인저러스한 A dangerous method


  제드 러벤펠드의 왜역판 "살인의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만 3년도 안 됐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마는, 융하고 프로이트 선생이 강연차(정신분석학이라는 "전염병"을 퍼뜨리려) 배 타고 도미했을 적에 셰익스피어 매니아인 주인공을 도와 어느 얄궂은 살인 해석에 보탬이 되었다는 얘기다.

  당 영화는 제목부터가 벌써 추리소설같이 데인저러스하다. 그런데 봐보니, 스승이 너무 똥과 성기만 들고 설친다 하여 반박을 일삼던 유부남 융이 몰래, 자기 아버지가 꾸짖을 때마다 오줌을 질질 쌌고 일찍이 그런 배뇨 와중의 추잡함 속에서,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보석 같은 성적 쾌락을 은밀히 건져낼 수 있었던 어느 여자 환자와 허리띠 들고 데인저러스한 메소드로 섹스를 진중하게 맛보곤 하였더라는 줄거리다.

  프로이트는, 오고 가는 슈필라인의 고발 서신과, 체통을 지키려는 융의 거짓말 중간에 끼여 고심하기 이전에 그 둘에게 졸지에 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인간의 정신 구성에 뽀르노가 한몫 한다고 그렇게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우겼는데도 말이다. 아마 성욕 환원주의에는 구체적이고 도구적인 뭔가가 결락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하야 남과 여는 성기와 오줌과 허리띠, 이 쓰리세트로, 정액을 소변보듯 뿌리며 사방팔방에 호래자식들을 생산하고 다니는 오토의 실천적 자유연애론을 폭력적으로 실천하였더라.

"찰싹 찰싹"


크로넨버그 선생님, 새삼스럽게 뭘 이런 얄궂은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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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The Right One In (2) : 이엘리를 위한 변명



But then, it's probably different when you're young
p.472


   독후 대미 장식 : 헐리우드가 모레츠 양과 맥피 군이라는, 금발과 흑발이 뒤바뀐 얄궂은 애들을 대동하고 카메라로 한번 잡아내려다 끝내 그 근처에도 못 갔다는 이 스위디쉬 러브스토리를 또 보는 일.

  
   물론, 세익스피어의 두 어린 사랑의 대명사들보다 더 어린 스웨덴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표정이 심어 준 인상은 독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오스카에 대한 "뚱뚱하다(fat, somewhat chubby)"는 옥에 티 같은 불쾌한 묘사는 싹 무시하자!). Lina Leandersson의 사연 어린 다부진 표정, 들여다보고 싶은 구슬 눈, 그리고 Kåre Hedebrant의 희미한 금발 눈섭과 씰룩이는 입술, 콧물 들을 떠올리지 않고서 도대체 어떤 이엘리와 오스카를 상상해야 할까?


   이엘리에게 바치고자 희생자를 거꾸로 매달아 목을 따던 초로의 신사도 처음엔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식사를 준비하느라 어둑한 밤길을 쏘다니는 그의 꼴은 막 풋사랑에 빠진 오스카가 장차 밟아야 할 전철인가?
   소년의 장차 일삼게 될 살인행각을 점치면서도 이엘리와 오스카하고의 관계가 "아름답고 애틋하게" 보였다면 그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전에, 뒤늦게 극장판을 처음 보고 남겼던 졸문. 지금은 이 스테레오타입 감상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고 싶다. 원작에 의하면, 이엘리가 종처럼 부리던 호칸인지 혹캰인지 하는 전직 교사 겸 플라톤(소크라테스) 애호가이자 동성 소아성애자를 만난 것은 "다행스럽게도" 그가 오스카만 할 때가 아니었다("소아" 외에 "동성"이라는 요소도 이 변태가 이엘리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결정적인 그의 기호였다). 나중에는 거의 얼굴 없는 좀비가 되다시피 하면서도 제 성욕만을 관철하는 이 성도착자의 성적인 공상과 성 행각을 묘사하여 당 소설을 단번에 성인물 반열에 올려 버린 저자가 직접 각본을 짰다는 스웨덴판 영화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은 못 지고 있다. 세월의 누진과 성장을 초월하여 열두 살의 앳된 성징에 갇혀 버린 작고 아름다운 육체에서 살아 있는 조각상의 영원을 발견한 고대 희랍인같이 숙명이라도 깨달은 듯 거기에 불혹을 넘긴 여생과 성기를 걸게 된 사나이 호칸. 동거하는 보람도 없이 그렇게 사정해도 손길 한번 허락지 않는 한 아동의 알몸과 애정을 꿈꾸고 염원하며 간혹 야밤에 휴대용 흡입마취 봄베와 피를 담을 통을 들고 다니게 된 마흔다섯의 이 중년이 이엘리와 만난 지는 불과 몇 년 안 되었더라. 을매나 다행이냐!

   헐리우드판 재탕. 추리물 플롯이라도 갖추려는 듯 호칸에 해당하는 시리얼 킬러가 어린 시절에 애비와 찍은 듯이 보이는 얄궂은 색 바랜 흑백사진 쪼가리로 오웬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지금은 비록 애정이 식어 주종 관계로 보일망정(소설에선 별로 주종적이지 않다) 애비가 수십 년을 이 남자와 함께 지내 왔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들 또한, 열차 안에서 트렁크 안의 이엘리와 모스부호로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오스카의 선선한 모습과 미소처럼 대단히 각별한 사이였으리라고 여기도록 하는데, 말하자면, 근 2세기 동안 많은 남자들(조력자들)을 그렇게 차례차례 피 공급자로 키우고는 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늙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 온 영악한 애 늙은이였으리라는 식이다. 그것도, 햇빛과 세간의 눈을 피해야 하는 장구한 천애 고독 속에서 어느덧 체득하고 만 합리적이고 비정한 내성으로, 같이 살아온 정과 죽은 자에 대해서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이 정신위생상 상책이리라 생각하는 비운의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면서 말이다. 병원에서, 이제 이엘리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숨죽여 흐느껴 우는 호칸이 자기 목을 내밀었다고 이엘리가 곧이곧대로 그 목을 냉큼 물었던 그 흐름과 성미를 끝까지 밀고 가려는 이같은 노선은 별로 달갑지 않다.

   그리고 또, 목을 딸 여러 도구와 함께 염산병을 챙기던 남자의 뺨을 애비가 어루만지는 씬을 보여 주며 "살기 위해 두 남자를 사랑한" 어쩌고 하는 재탕 예고편의 편집 모양새 및 (어폐가 있는) 한글 문구 역시 원작이 남긴, 유추 가능한 은은한 서광에 똥칠을 하고 있다. 영양 섭취에 고충이 좀 있다 뿐이지 오웬(오스카) 같은 젖내 나는 애 없이도 애비(이엘리)에게는 알아서 피도 구해다 주는 연인이 있고 그리고 삼십 년 이상을 쭉 같이 살며 사랑하며 사정상 여기저기 전전하던 차에 어쩌다 오웬네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투다. 같은 "사랑"이라는 낱말로 포섭되는 떠는 해와 지는 해 : 순수한 애정 릴레이. 말이 좋다. 아메리카판 호칸은, 호모 페도필리즘 같은 징그럽고 발칙한 성애와 무관하게, 또는 제 성기의 이차 용도에 눈뜨기도 전에 그가 유년 시절에 홀딱 반한 소녀 내지 소년을 세상에 등을 돌리면서까지 일편단심 사랑하며 일용할 피를 갖다 바쳐 왔다는 가설을 밀어붙인 데서 생긴 인물이다. 그래서, 북구 영화의 흥행 여세를 몰아 아이들을 주연으로 앉힌 같은 줄기의 영화에서 두 아이의, 어떤 경계를 초월한 지란지교 노선으로 가는 마당에 페도필리아의 저속한 성적 행태를 찍어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면서까지 관람 등급을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여 작정하고 삼천포로 빠진 겐가?


    나는, 호칸에게 호의를 보이며 먹이사슬을 초월한 러브스토리의 전례를 제2의, 제3의 호칸이 될 오웬(오스카)에게 떠넘기며 원작의 동성 소아성애를 감히 정화하려 했던 재탕을 보고, 이 때문에 기억 속에서 스웨덴판이 오염된 것을 소설을 읽고 나서 알았다. 뒤에 본 것이 그리고 그것의 각색 됨됨이가 무슨 보강이라도 하려는 듯 2년을 역상하여 알프레드슨의 감성과 블락께베리의 아름다운 눈밭 및 이엘리의 개인사를 더럽힌 거다. 낮의 파수꾼과 잠자리를 위한 핏물 욕탕이 필요했던 이엘리 곁에 이백 년간 여러 조력자가 있었다면, 또 그들이 하나같이 염산 휴대를 불사할 정도였다면, 게다가 동거하는 그 누군가의 애정 어린 눈길과 따뜻한 팔베개 덕에 이엘리가 고독을 모르고 살아왔다면 하고 상상하게 하는 것은 무언가를 간과하게 하는 짓이다. 오스카. 오스카의 존재. 콧물 질질 흘리던 그 오스카 말이다.

    4학년 때 오스카가 키우던, 짧게 살다 간 개가 상기시키는 두 인생에 대한 세월의 대비처럼, 뱀파이어의 영원에,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한 짧디짧은 에피소드와 묘비를 남기고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언젠가는 그 빛이 바래고 말 사진 속의 소년... 이라는 전제를 벗어날 수 없는 예비 호칸, 살인자... 라는 운명 같은 통념의 창살에 갇힌 아이. 재탕판의 "호칸에 대한 묘한 호의"에서 저주받고 장차 도덕적 적개심을 짊어질 아이. 열차 안에서의 선선한 모습은 가히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되 그것은 결국 위험천만하고 잔인한 사랑, 얄궂은 죄와 벌을 환기시키는 슬픈 장밋빛에 불과하리라는, 막고 싶으나 자꾸만 숨어드는 확신 같은 것이 재탕판이 요구하는 골인 지점이다. 그래도, 이엘리가 지금은 오스카에게 유일무이한 등불이라 한들,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 생물 앞에서 이 소년도 언젠가는 세월의 물살에 망각의 한 점으로 휩쓸려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두 아이가 같이 영원히 살거나 아니면 한날한시에 같이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을 많은 독자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오스카가 뱀파이어 세례를 받든지, 아니, 적어도 염산 들고 다니면서 사람 목을 따는, 나이 든 오스카는 상상하기 싫을 게다.

    이를 감안하면 여기서 추려낼 수 있는 최소한의 정서적인 합의점이 딱 하나 생긴다는 것 : (설사 오스카가 이엘리와 동류가 된다 치더라도) 소년이 언제까지나 소년이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마음에서 이엘리의 수명을 오스카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순수하리라고. 소설에선 오스카가 이엘리에게 영향을 주었듯 이엘리 역시, (도벽이 심한) 왕따 소년의 도덕적 의식 비슷한 것에 영향을 받는 듯한 모습(불량배 토미한테 돈 주고 피를 사서 빨아먹는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요지는 오스카가 인간 역성만 들어 흡혈귀의 흡혈 습성에 의한 범법행위를 나무라는 데에 있지 않다(그런 개똥윤리는 칼싸움 잘하는 데이워커한테나 맡기자). 서로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고 또 앞으로 소중하리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두 아이의 사랑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소생은 그것이 당 소설의 The Right One이라 생각하고 싶다. 무슨 말이냐? 요컨대, 이백 년간의 고독을 앓던 이엘리가 사타구니에 피스볼 끼고 다니며 칙칙한 나날을 보내던 왕따 소년 오스카를 만난 그 사건 자체가 둘만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참사랑의 시작이었으리라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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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The Right One In (1) : Lacke & Virginia


   전직 마술사 겸 코믹이었던 린드크비스트. 그가 직접 각본을 맡았다는 그 스웨덴판 영화의 정서를 이어가고자 혹시나 해서 사 두었던 영역판. 한 팔 개월쯤 첫 페이지가 누렇게 뜰 정도로 책상 한구석에 썩혀 두고 있다가 읽었다.

   기껏해야 뱀파이어물.. 그런데 말이다, 읽어 보니 언제 또 이만한 작품을 접할 수 있을지 몰라 걱정이다.


  Lacke & Virginia

   영화처럼 주인공이 딱히 두 명이라 할 수는 없었다. 사백칠십 페이지 분량 가운데 괄목할 만한 지면이 스톡홀 근교 블라케베리의 오스카네 근방에 사는 여러 불량 학생들 외에 몇몇 케세라세라 중년 술꾼들의 막막한 바닥 인생살이와 술잔으로 나누는 잡담 섞인 우정 및 담배꽁초와 술병들, 누군가의 고약한 오줌냄새를 쫓고 있다. 모두가 이엘리처럼 어디선가 솟아나 그저 어디론가 사라질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 주정뱅이 무직자 라케와 폐경기에 접어든 슈퍼마켓 점원 비르기니아 : 부부도 아니고, 별 희망도 없이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며 따로 사는 나이 든 커플 : 오스카와 이엘리의, 눈물 콧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에 집중하느라 영화에서는 야속하게도 각본상 촌극 수위로 다루어졌던 라케의 절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자기 여자를 잃고 맺힌 원한이 어느 정도의 분노였는지 그 곡절이 자세하게 소묘되어 있다.

   딱히 몰라 준 것도 아닌데 요케를 잃은 슬픔을 몰라 준다고 이 남자 라케가 괴스타 집에서 술김에 뱉은, 친구 귀한 줄 모르는 화냥년이라는 못난 소리에 서러워서 그곳을 뛰쳐나와 울고불고하며 집에 가던 중, 불쑥 하늘에서 솟아난 이엘리에게 그만 물어뜯기고 만 이후로 서서히 흡혈귀로 변모해 가는 가난한 여인 비르기니아. 이후 헬리오포비아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심층적이다. 햇빛 차단, 두문불출, 어둠이라는 피난처, 벽장 속의 이불 속. 식욕부진. 몸 안 심장 언저리에서 자라며 이성을 잠식하려 드는 모종의 생물. 1분에 서너 번밖에 뛰지 않는, 뛰지 않아도 되는 심장과 기이한 무호흡 증후. 예민해진 오감, 아니,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분간해내는 이상한 시청각, 아니, 어둠 속에서야말로 모든 것을 분간해내는 초감각...

   식음전폐 또는 다른 무언가를 목말라하는 저항할 수 없는 식욕 : 피... 어쩌다 생긴 작은 상처에서 맛본 자신의 피, 그 맛... 변한 미각이 독실하게 간구하는 단 하나의 맛. 마구 빨고 빠는 가운데 도취되어 황홀감에 용해되어 제 갈 길을 잃은 이성. 칼. 자해의 시작. 자기 살을 수십 번도 더 긋고도 금방 치유되고 마는 상처들. 어두움 속에서도 또렷이 볼 수 있는, 자기 피로 얼룩진 양탄자. 자신의 피를 빠는 괴이한 자기 모습... 떠오르는 가족의 얼굴들 : 혼자 사는 어머니와 시집간 딸, 손자 들. 이 꼴로는 앞으로 볼 수 없는, 이제는 잃어 버린 머나먼 얼굴들. 차올라 주체할 길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외로운 여인 비르기니아.
   괴스타의 지린내 진동하는 아파트에서, 뱀파이어를 알아보고 발광하기 시작한 고양이 수십 마리와 일전을 벌이다 복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그리고 병원. 그곳에서 예전에 제 아버지 집에서 훔쳐 둔 고가의 우표로 키워 온 낙관과 뒤늦게 굳힌 결심으로 자기 여자에게 앞날을 속삭이는 라케. 옆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기 속의 흡혈귀가 사랑을 삼키고 암울한 핏빛 장래만 남길 뿐이라고 비관하는 비르기니아. 슬픔이 커질수록 라케를 향한 애정도 운명처럼 커져만 간다. 그래서 더더욱, 남자의 목을 물어뜯기 전에 인간으로서 죽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는 여자. 많은 페이지들이 두 사람의 심경을 오랫동안 기록해 왔던 무거운 누적과 그것이 얹힌 그 문맥적 설득만큼이나 독자의 기분은 가벼워질 수가 없다. 희망과 절망이 덧없이 교차하는 애달픈 병실. 저자 욘은 사람 쪽도 아닌 흡협귀 쪽으로 독자의 더 많은 동정심을 몰아가는 마술을 선보인다.

   안타까움을 일으키는 많은 묘사들. 허구 중의 허구 뱀파이물에서 우러나는 보석 같은 감정들. 그런 흡혈귀물에서조차 괴기 이상의 것을 일으켜 애절함을 이끌어내는 레토릭의 흐름과, 이 흐름에 많은 시간을 기울인 작가의 정신적 스태미나. 수많은 보조관념들이 이제 막 흡혈귀가 된,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려는 여자의 체념과 회한과 호흡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날 즈음 남자에 대한 여인의, 언제까지나 병실 허공을 떠도는 때늦은 전신전령의 고백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Lacke. I love you."
    그러나 사랑 고백이 사랑을 담은 결심이었다는 것을 못 알아들은 채 여자의 손을 꼬옥 잡고 곤히 잠든 사내. 그의 꿈은 아직 달콤하기만 하다. 별스레 큰 꿈도 아니었다. 시골에 감자밭 딸린 집을 하나 사서 이 여자와 여생을 함께 보내는 것... 꿈은 왜 그토록 늑장을 부렸던가... 간호사에게 블라인드를 열도록 부탁하고 아침 햇살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려는 바로 그 순간, 다음과 같은 기억의 주마등에 이른 대목에서는 애처로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친구의 죽음에 연연하던 중에, 시신조차 못 건진 비르기니아의 죽음으로 앞날의 상실과 빤히 보이는 그 끝자락의 공허를 견뎌야 할 이유가 없어진 라케. 희망의 공동, 절망. 또 다른 주정뱅이 라리의 거처에 모르간과 같이 당도할 즈음에 터져 나와 아파트 단지를 뒤흔들어 놓는 한동안의 대성통곡. 그들을, 특히 자기 여자를 비통과 죽음으로 내몬 어린 흡혈귀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안 죽일 수가 없다.

   라케는 오스카를 멀찌가니 이렇게 바라보던 사내였다.
Lacke gazed after the boy struggling on with his bags in the direction of some nearby apartment buildings. Looked so damned happy. That's how you should be. Accept your burden and carry it, with joy.
That's how you should be.(p.178)
독자는 골을 싸매고 고민해야 할 판이다. 온몸에 마늘 다발을 칭칭 감고 말뚝과 망치를 들고 어디선가 날어든 대결구도의 대칭적인 존재, 뱀파이어 헌터도 아니고,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같이 가볍게 와서는 물어뜯겨 가볍게 죽어 줄 악당도 아닌,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그가 영화에서처럼 오스카의 방해로 이엘리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주지의 사실을 감당해야 할 처지니까.

   그러나 애석하고 요상한 일이지만, 무엇이 어이 되든 안으로 굽은 팔처럼 심정과 정서는 이미 두 아이의 사랑과 미래를 위한 이엘리의 생존을 편들게 되어 있다. 그가 오스카의 반쪽을 죽이는 짓, 그런 결과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원치 않게 되어 있다. 애초에 이엘리가 거기서 죽어 생겨날 애틋한 로망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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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KER TAILOR SOLDIER SPY


  나팔소리가 귀에 익다. La Mer는 현존 카사노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불렀던 모양이다. 라이브가 출발하기 좋도록 연회장에서 출발하여 총출연자의 면면과 추후의 팔자를 내리훑고 지나와, 스파이와 배신자들의 소굴, 방음 스펀지룸에 조용히 개선한 스마일리가 전 정보국장 컨트롤의 자리에 앉아 빈 의자들을 한 번 죽 훑어보고 La Mer의 '박수'와 함께 끝나는 장면의 이 종막 방식이, 알프레드슨의 레토릭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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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앤 헤드폰


  뭉크의 대표작, 절규하는 대머리를 보고 오를록 백작을 떠올린 건 아니었다. 다만 탁구공 눈알을 박아 넣는 김에 떡니도 살짝 그려 넣고 싶은 충동을 따르다 보니 "노스페라투"의 영락없는 그 흡혈귀 꼴이다.

  " 絶叫 ". 말이 참 좋다. 누구든 알아주십사 하는, 절규라 할 만한 저런 심각하고 무거운 고함을 지르며 예술적으로 고통스러워한 적은 없다. 아이큐 두 자리가 그런 차원적인 고통을 짊어져서야 되겠는가. 한데 원그림을 보고, 창공이 노을빛에 물들어 어스름해질 무렵 산책 삼아 다리 위를 거닐다가 재수 없이 똥 밟았다고 저렇게 절규했을 리는 없다고 해서, 사내가 몸을 비틀면서까지 무얼 그리 절규했을까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누구나 직관 하나로 알 수 있다고 여겨지곤 하는 무슨 풍설, 물론 무슨무슨 불안에 관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오는 동안 남자가 줄곧 저 모양이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마는, 보다시피 귀를 막고 절규하고 있다. 누구 들어라고 하는 절규는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그 폼을 보아 우리는 '순수하게도' 단번에 환청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돌았구나!"

  그래, 돌았다. 머리 일부를 구성하는 입과 귀와는 별도로, 골 안에서 생긴 잡음을 밖에서 나는 소리라고 죄 없는 귀를 가리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두개 속의 뇌수는 말초신경계가 외계의 인상들을 수집해서 그대로 갖다 바치는 세계의 거울이 아니었던 게다.

  그런 저 남자가 불쌍하다고 폰카로 찍은 내 왼손을 양 귀퉁이에다 오려 붙이고 구원의 헤드폰을 그려 넣은 건 아니다. 원래 동정심을 일으킬 만한 화풍도 아니올시다. 곤비한 정신의 빈곤한 상상만큼이나 그 폼이 헤드폰에 딱 맞게 보이는지라 그저 귀에 관해 뭔가를 씨불일 또 한 번의 기회로 삼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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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취사선택


  넷상에서 건진 얄궂은 귀 사진에다 현재 사용 중인 스피커의 이어폰 구멍 사진을 갖다 바른 다음, 피씨 옆에서 한참을 썩어 가던 타블렛으로 약간 손질한 것. 지금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 당 블로그의 프로필용으로 만들었다.

정말이지 귀는 막고 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눈에는 눈꺼풀이 있으면서, 그놈의 귀에는 왜 좆같이 귓꺼풀 하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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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rot: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 포와로의 눈물

  읽었던 게 대개 해문출판사 것들이었는데, 아이큐 두 자리가 그렇게 크리스티 여사의 몇몇 작품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 벨기에인이 급행열차 타고 이스탄불을 빠져나가다 맞닥뜨린 사건에 대하여는, 80년대 중반 티비에서 74년판 영화로 본 일도 있고 해서 원작을 읽은 적은 없다(범인을 아는데 읽어서 뭐하노?). 그렇지만 세상천지가 다 아는 범인들에 관한 재탕 삼탕 추리물이라도 영화는 본다. 특히, 시작된 지 이삼 분 만에 수작이리라고 바로 직감할 수 있는, 게다가 살인사건을 단지 퍼즐로만 여기는 얄팍한 살롱 무드가 살짝 뒤로 빠져 주는 이런 포와로-등장극은 놓쳐서 될 일이 아니다.


침울 그리고... 눈물

  스토리는 극의 초두와 대미를 장식하는 이 두 표정 사이에서 전개되는데, 원제를 제치고 타이틀의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2010판은 무슈 포와로의 복잡한 심경과 고독이 극의 두각이다.
"내가 과연 옳은 일을 한 것인가?"

  범인 지목과 단호한 논파의 결국은 언제나 모든 범인의 몸과 정신과 어느 옳바르지 못한 선택에 대한 죄과를 법정에 세우는 일로 끝맺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목한 범인이 바로 콧수염 앞에서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을뿐더러 자주 겪는 일이라 해서 면역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창조주 크리스티 여사조차 싫어해서 빨리 죽이려 했다던) 이 에고이스트의 얼굴과 체면에다 핏물을 튀기고 그렇게 보란 듯이 자신을 시체로 만들며 법망과 절망을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리는 통에 탐정은 그런 짓이 몹시 불쾌하고 치사하고 괘씸하다. 그러다 분노와 동요와 혈흔은 곧 정수리를 타고 들어가 점차 멍이 되고 큼지막한 좌절이 되어 벨기에인의 마음은 시꺼먼 그을음 같은 회한으로 가득하게 된다. 법 앞으로 몰고 가려다 결과적으로 자살로 몰고 간 지경에 대하여 자기 변명에 가깝기는 했으리라마는, 그래도 어떤 행동이든 선택한 자의 책임이라 하여 입술로는 자기가 옳았다고 우길 여력이 아직까지는 남아 있었다.

"앞으로 대체 어느 나라의 형사사건만 맡아야 한단 말이냐?"

  국경을 넘나드는 런던행 특급열차를 타기 전 그곳 이스탄불에서 탐정은 딴 남자의 씨를 배태하고 도망가던 어느 아낙네가 남편과 동네 사람들에게 붙들려 돌로 맞아 죽는, 일종의 명예살인 현장을 엿보게 된다. 공권력 개입도 그럴 틈도 없이 떼로 몰려들어 벌이는 격정적이고 즉각적인 판결 및 야만적인 법 집행을 목도하기에는 때마침 자살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던 바 정신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곤고한 처지의 여인에겐 장교처럼 자살을 선택할 은혜롭고 사치스러운 틈도 총도 없었고, 한편 포와로에게는, 돌덩이를 쳐던 이슬람 신사 숙녀 여러분을 불러 모아 엄숙한 정적과 서구적 교양인의 자세를 강요하고 자신의 추리력과 명성을 걸어 여인의 임신 경위를 따질 만한 분위기도 장소도 애초에 아니었거니와, 늘 묵주를 소지하고 다니던 그에게 그 가운데로 끼어들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며 예수 행세를 할 수 있는 용기도 권위도 터키어 능력도 없었다. 이 속수무책이 이국 방관자의 정언명령적 정신의 무엇인가를 또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랬으리라고는 하나, 저 보기에 그같은 종교적 자치 처형 방식이 심히 불쾌하고 부조리할지라도 소크라테스의 임종과 유언이라도 마음에 떠올려 두고는 국경 없는 법이 없는 만큼 그것이 남의 나라의 악법이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애써 자위할 여력이 아직까지는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이 영화는, 우리더러 사설탐정의 심적 상태를 염두에 두고 같이 열차를 타라 하고, 극중 시종일관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된 모습을 하고 나오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정서적 동의를 얻어내고야 마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사건과 조우하며 정의를 옹호하다가도 어떻게 가해자들의 처지를 곤혹스러워하는지 잘 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표현하고 싶었을 크리스티 여사가 어쩌다 망각했다고 믿고 싶은, 무슈 포와로의 저 눈물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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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波牛) : 이새봉

  요사이 "土豆网(tudou.com)"라는 대륙의 동영상 사이트를 열나게 드나들며 옛 홍콩영화를 훔쳐보고 산다. 물론 말도 못 알아듣고 글도 못 읽는다마는, 그래도 어쨌든 보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명색이 홍콩영화. 하물며 본 적이 있는 영화라면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십오, 육 년 만에 보는 것인데, 당 육박전 축구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시아의 수퍼촐랑이스타 원표나 쌈 잘하는 악역스타 적위(狄威)보다, 드문드문 나오는 바람에 거의 단역 꼴이 된 이새봉(李賽鳳), 이 어여쁜 꾸냥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본다 해도 모르는 얼굴도 아니었던 바, "어쭈구리, 오날따라 왜 이리 예뻐 보이지?" 그리 생각했다(원래 예쁘지만).


http://www.tudou.com/programs/view/1F4Ba84q5B0/

  이 느낌이 어찌나 새삼스러웠는지 무의식이 무의식중에 기억을 검색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검색 결과는 이틀이나 걸리도록 더뎠는데, 그 내용인즉 신정환급 광대뼈에 얽힌 기억이었다. 한참 후에야 누군가와 닮았다는 느낌이 뒤따랐던 게다. 그렇다고 소피아 로렌이나 토키와 타카코처럼 누군가의 광대뼈가 그들의 콧대와 높이를 겨룰 만한 규모라고 할 것까진 없다. 그 기억은 어느 마름모꼴 얼굴 윤곽과, 그 면적 안에 오밀조밀하고 예쁘게 구성된 이목구비가 배꼽 밑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불어넣고 남근을 불러 세웠던 사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야 기억이 추려 낸 (한때 볼 때마다 소생으로 하여 침을 질질 흘리게 만들었던) 그 얼굴로 말할 것 같으면.. (클릭)
왜국 AV 아이돌스타
川嶋和津美
아이고 예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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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 8 : 괴물과의 조우


  두 번째 예고편에서 느낀 당 영화의 가장 큰 유혹이 무엇이었냐 하면, 저 두 사나이가 하고 있는 딱 칠십 년대 말의 그 행색이었다. 초능력물로 착각했던 관계로 괴물 혹은 에이리언이 등장하는 줄도 몰랐거나 어쨌거나, 스토리야 따블제이와 이티 감독한테 맡겨 두면 되지 하고서 봤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이구 저런! 변성기도 채 거치지 않은 남자 애들하고 금발 딸내미가 주인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째지는 목소리들이 을매나 시끄러웠는지 말도 마라.


  아이들이 슈퍼에잇으로 찍던 영화는 좀비물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밖으로 좀비가 나오는 일은 없거니와 대신 외계생물 한 마리가 나온다. 지구 출신의 사람의 아들인 리빙데드는 오락적인 상상과 필름 속에 가두고 미지와의 조우를 리얼리티로 삼았다는 게다. 배경 년도가 칠십구 년이면 그 전년도에 전세계를 휩쓴, 크립톤 출신의 클라크 켄트라는 우호적인 외계인 영화가 있었을 텐데도, 괴물이 나타나 버스를 뒤집을라치면 어디선가 빨간 망토를 펄럭이며 두 팔 뻗고 날아들 외계인이라도 찍게 되진 않을까 하는 기대 어린 대사 하나 없었다(쳇!). 게다가, 비릿한 문어 피부에 흉측한 짐승 꼴을 한 거대한 외계 걸리버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갇혀 군인들 및 과학자들한테 당한 생체실험 내지 그런 프랑켄슈타인 박사들에 대한 환멸 때문인지 독을 품고 복수심에 불타거나 아니면 실험으로 정신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설치고 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지나친 인상인가?

  액자적인 존재였던 좀비의 마인드를 받들어 사람을 잡아먹는 야먄과, 야만적인 모습을 하고 얄궂은 고물들을 모아다 조립하여 혹성 탈출을 감행하려는 피해자 이티. 더러워서 이런 야만적인 혹성에선 도저히 못 살겠다며 타고 날아오르는 비행물체와 그 장관을 등장소년소녀들이 군바리들과 나란히 넋을 잃고 관람한다. "활주로 없이 날아온 대로 날아갈 수 있는 앞선 외계 문명의 위대함, 우와~!" 아마 이런 상쇄 효과라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니, (적어도 주인공) 애들의 심적 정화를 위해서라도 외계생물의 행각이 남긴 트라우마를 지우고 괴물과의 조우를 미지와의 조우로 삼아 극을 마감하려는 수작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불만의 반열에 오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관람 중반부터 스필버그의 옛날 영화들을 계속 떠올려야 했던 것이 불만이었다. 본 것을 돈 내고 또 본다는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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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 FC : 세바스찬 쇼우

  수적으로 극소수 같으면 기적을 행한다 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각 뮤턴트를 축으로 신정국가들이 건국되었을련만, 원작자가 많은 뮤턴트들의 등장을 감안한 탓인지, 그들 중 일부의 외모를 책잡아 전체를 몬스터라 싸잡는 시민적 공감대나 인류 대 뮤턴트 구도가 형성되기도 전에 제풀에 주눅이 든 옛날 뮤턴트의 기본 정서에서 시작한다는 분위기다. 그들의 능력이 열등감으로 억압되어 있는 것은, 코믹답게 뮤턴트들을 다발로 등장시키려면 공생에 관한 시민권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에서 기인한 모양인데, 공권력적인 어떤 파괴력에 저항할 수 있고 또한 어떤 독자적인 파괴력으로 한 도시 전체를 거덜 낼 수 있는 네 이웃의 파괴력 및 언제 들고일어날지 모를 잠재적인 지배력을 사랑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등장뮤턴트 중 몇몇은 단독으로 세상을 개차반으로 만들거나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실로 경이로운 능력을 지녔다(정말이지 대단한 능력들이다!). 선망하기보다 이 설화적인 능력들을 "돌연변이" 카테고리 하나로 엘리펀트맨의 흉측한 외모 정도에 끌어내려 차별하는 윤리가 병신이나 되는 듯 그들로 숨어 살게 하고 그같은 은둔이 세상을 어느 정도 평온케 하고 있었다는 기운까지 감돈다.


  에릭이 해저의 잠함을 보란 듯이 끌어올리는 장관에 버금가는 아리따운 로즈 번의 란제리 차림 외에도, 우리는 숨어서 살기는커녕 뮤턴트계만의 결속을 다져서 그 고요한 기운을 깨트리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정치계의 막후에 출몰하여 냉전시대의 정점을 조성하고 다니는 세바스찬 쇼우와 그의 신기를 목도할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0Yq7Za1JnZg&feature=player_embedded#at=67

  어떤 물리적 파괴력이라도 흡수하여 되받아치는 특이한 능력이다. 이 능력은 시간을 두고 쩨쩨하게 서서히, 그러나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초장에 매드사이언티스트연하던 그 역시 돌연변이였다는 각본이다. 수류탄 들고 와서 내 돈 내놔라고 위협하는 장성에게 그것을 빼앗아 몸소 터트려 보이면서 몸에 상처 하나 안 생기는 수준이 아니라 선글라스 및 새하얀 정장은 물론이고 백구두에도 흠집 하나 안 나도록 '폭발 중인 폭발'을 모으고 꾹꾹 눌러 말아서 작은 덩어리로 만든, 폭탄도 아닌 폭발을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불구덩이 속에서 초연한 표정으로 의연하게 걸어나오기는 하되 거지꼴을 한 터미네이터처럼은 안 되더란 말이다. 여기서, 기이한 능력을 가진 괴뢰 뮤턴트들의 통솔자가 단지 정치적인 야심만 가진 인간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보스 지위에 걸맞게 세상을 초토화할 수 있는 불사신임에 도리어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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