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마술사 겸 코믹이었던 린드크비스트. 그가 직접 각본을 맡았다는 그 스웨덴판 영화의 정서를 이어가고자 혹시나 해서 사 두었던 영역판. 한 팔 개월쯤 첫 페이지가 누렇게 뜰 정도로 책상 한구석에 썩혀 두고 있다가 읽었다.
기껏해야 뱀파이어물.. 그런데 말이다, 읽어 보니 언제 또 이만한 작품을 접할 수 있을지 몰라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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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cke & Virginia 영화처럼 주인공이 딱히 두 명이라 할 수는 없었다. 사백칠십 페이지 분량 가운데 괄목할 만한 지면이 스톡홀 근교 블라케베리의 오스카네 근방에 사는 여러 불량 학생들 외에 몇몇 케세라세라 중년 술꾼들의 막막한 바닥 인생살이와 술잔으로 나누는 잡담 섞인 우정 및 담배꽁초와 술병들, 누군가의 고약한 오줌냄새를 쫓고 있다. 모두가 이엘리처럼 어디선가 솟아나 그저 어디론가 사라질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 주정뱅이 무직자 라케와 폐경기에 접어든 슈퍼마켓 점원 비르기니아 : 부부도 아니고, 별 희망도 없이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며 따로 사는 나이 든 커플 : 오스카와 이엘리의, 눈물 콧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에 집중하느라 영화에서는 야속하게도 각본상 촌극 수위로 다루어졌던 라케의 절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자기 여자를 잃고 맺힌 원한이 어느 정도의 분노였는지 그 곡절이 자세하게 소묘되어 있다.
딱히 몰라 준 것도 아닌데 요케를 잃은 슬픔을 몰라 준다고 이 남자 라케가 괴스타 집에서 술김에 뱉은, 친구 귀한 줄 모르는 화냥년이라는 못난 소리에 서러워서 그곳을 뛰쳐나와 울고불고하며 집에 가던 중, 불쑥 하늘에서 솟아난 이엘리에게 그만 물어뜯기고 만 이후로 서서히 흡혈귀로 변모해 가는 가난한 여인 비르기니아. 이후 헬리오포비아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심층적이다. 햇빛 차단, 두문불출, 어둠이라는 피난처, 벽장 속의 이불 속. 식욕부진. 몸 안 심장 언저리에서 자라며 이성을 잠식하려 드는 모종의 생물. 1분에 서너 번밖에 뛰지 않는, 뛰지 않아도 되는 심장과 기이한 무호흡 증후. 예민해진 오감, 아니,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분간해내는 이상한 시청각, 아니, 어둠 속에서야말로 모든 것을 분간해내는 초감각...
식음전폐 또는 다른 무언가를 목말라하는 저항할 수 없는 식욕 : 피... 어쩌다 생긴 작은 상처에서 맛본 자신의 피, 그 맛... 변한 미각이 독실하게 간구하는 단 하나의 맛. 마구 빨고 빠는 가운데 도취되어 황홀감에 용해되어 제 갈 길을 잃은 이성. 칼. 자해의 시작. 자기 살을 수십 번도 더 긋고도 금방 치유되고 마는 상처들. 어두움 속에서도 또렷이 볼 수 있는, 자기 피로 얼룩진 양탄자. 자신의 피를 빠는 괴이한 자기 모습... 떠오르는 가족의 얼굴들 : 혼자 사는 어머니와 시집간 딸, 손자 들. 이 꼴로는 앞으로 볼 수 없는, 이제는 잃어 버린 머나먼 얼굴들. 차올라 주체할 길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외로운 여인 비르기니아.
괴스타의 지린내 진동하는 아파트에서, 뱀파이어를 알아보고 발광하기 시작한 고양이 수십 마리와 일전을 벌이다 복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그리고 병원. 그곳에서 예전에 제 아버지 집에서 훔쳐 둔 고가의 우표로 키워 온 낙관과 뒤늦게 굳힌 결심으로 자기 여자에게 앞날을 속삭이는 라케. 옆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기 속의 흡혈귀가 사랑을 삼키고 암울한 핏빛 장래만 남길 뿐이라고 비관하는 비르기니아. 슬픔이 커질수록 라케를 향한 애정도 운명처럼 커져만 간다. 그래서 더더욱, 남자의 목을 물어뜯기 전에 인간으로서 죽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는 여자. 많은 페이지들이 두 사람의 심경을 오랫동안 기록해 왔던 무거운 누적과 그것이 얹힌 그 문맥적 설득만큼이나 독자의 기분은 가벼워질 수가 없다. 희망과 절망이 덧없이 교차하는 애달픈 병실. 저자 욘은 사람 쪽도 아닌 흡협귀 쪽으로 독자의 더 많은 동정심을 몰아가는 마술을 선보인다.
안타까움을 일으키는 많은 묘사들. 허구 중의 허구 뱀파이물에서 우러나는 보석 같은 감정들. 그런 흡혈귀물에서조차 괴기 이상의 것을 일으켜 애절함을 이끌어내는 레토릭의 흐름과, 이 흐름에 많은 시간을 기울인 작가의 정신적 스태미나. 수많은 보조관념들이 이제 막 흡혈귀가 된,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려는 여자의 체념과 회한과 호흡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날 즈음 남자에 대한 여인의, 언제까지나 병실 허공을 떠도는 때늦은 전신전령의 고백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Lacke. I love you."
그러나 사랑 고백이 사랑을 담은 결심이었다는 것을 못 알아들은 채 여자의 손을 꼬옥 잡고 곤히 잠든 사내. 그의 꿈은 아직 달콤하기만 하다. 별스레 큰 꿈도 아니었다. 시골에 감자밭 딸린 집을 하나 사서 이 여자와 여생을 함께 보내는 것... 꿈은 왜 그토록 늑장을 부렸던가... 간호사에게 블라인드를 열도록 부탁하고 아침 햇살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려는 바로 그 순간, 다음과 같은 기억의 주마등에 이른 대목에서는 애처로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친구의 죽음에 연연하던 중에, 시신조차 못 건진 비르기니아의 죽음으로 앞날의 상실과 빤히 보이는 그 끝자락의 공허를 견뎌야 할 이유가 없어진 라케. 희망의 공동, 절망. 또 다른 주정뱅이 라리의 거처에 모르간과 같이 당도할 즈음에 터져 나와 아파트 단지를 뒤흔들어 놓는 한동안의 대성통곡. 그들을, 특히 자기 여자를 비통과 죽음으로 내몬 어린 흡혈귀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안 죽일 수가 없다.
라케는 오스카를 멀찌가니 이렇게 바라보던 사내였다.
Lacke gazed after the boy struggling on with his bags in the direction of some nearby apartment buildings. Looked so damned happy. That's how you should be. Accept your burden and carry it, with joy.
That's how you should be.(p.178)
독자는 골을 싸매고 고민해야 할 판이다. 온몸에 마늘 다발을 칭칭 감고 말뚝과 망치를 들고 어디선가 날어든 대결구도의 대칭적인 존재, 뱀파이어 헌터도 아니고,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같이 가볍게 와서는 물어뜯겨 가볍게 죽어 줄 악당도 아닌,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그가 영화에서처럼 오스카의 방해로 이엘리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주지의 사실을 감당해야 할 처지니까.
그러나 애석하고 요상한 일이지만, 무엇이 어이 되든 안으로 굽은 팔처럼 심정과 정서는 이미 두 아이의 사랑과 미래를 위한 이엘리의 생존을 편들게 되어 있다. 그가 오스카의 반쪽을 죽이는 짓, 그런 결과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원치 않게 되어 있다. 애초에 이엘리가 거기서 죽어 생겨날 애틋한 로망일 리가 없다.